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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ousness

작은 동네 학원의 강사

다재소능 2009. 6. 13. 23:12
04년 복학 이후 경제적 자립을 선언했기에 학교를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생에겐 투입 시간 대비 최고의 고효율의 아르바이트인 과외란 것을 한동안 열심히 했었다.

이 과외란 일은 페이를 선불로 받기 때문에 더할나위 없는 최고의 일자리였지만 단점이 있는데 고용 안정(?)이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보통의 경우에 과외를 그만하겠다는 통보를 갑작스럽게 당하기(완벽히 수동형이다) 때문에 잠깐 동안의 실직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경제적인 압박이 상당했다.


우연한 기회에 동기 놈의 소개로 공부방에 강의를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전공과는 무관한 "과학"이라는 과목을 강의한지 만으로도 3년하고도 반 이상을 훌쩍 넘겨버린 준 베테랑 강사가 되어 있다.

그 사이 공부방은 원장 선생님의 공격적인 투자로 인해 2번에 걸쳐 건물을 옮기면서 번듯한 동네의 보습학원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예전과는 달리 나도 다른 보습학원의 선생들이 하는 강의 이외의 업무(담임반 관리, 학부모 상담 등)도 하는 선생이 되었다.

학원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대부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3가지 정도의 그룹으로 애들이 나뉜다


A그룹 - 소위 말하는 공부 잘하는 애들, 이해력 높음, 기본기 탄탄, 당연히 성적도 좋음
B그룹 - 그냥 그런 아이들, 이해력은 준수, 하지만 기본기가 부족, 성적은 고무줄
C그룹 - 이마에 '난 공부가 세상에서 젤 싫어요'라고 써놓고 있는 애들, 공부를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수준이기에 대략 난감


대부분의 부모들이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성적 향상(특히 내신)"

따라서 가르치는 입장에서 A그룹의 학생들이 많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쾌재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A그룹을 학생들이 너무 많은 반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안 가르쳐도 잘 할 애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아니라 그 누가 되어도 상관없고 실제로는 학원을 다닐 필요도 없다.

가르치는 입장에선 B그룹에 속하는 애들이 많은 반이 제일 재미있고 신난다. 소위 말하는 '가르칠 맛'이 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적 향상에 초점을 맞춘 교육이라는 것이다. 우리 애 성적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항의 전화를 한 학부모에게 '어머니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시면 안됩니다.' 라고 말하는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이다.
그래서 능력 있는 강사들은 애들에게 채찍과 당근을 주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성적을 끌어 올린다. 그렇다면 결말은 해피엔딩일까? 

불행하지만 내가 보기엔 전혀 해피엔딩이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의 경우 그렇게 성적을 끌어 올린 애들은 작은 변화만 일어나도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리 듯이 성적이 다시 곤두박질 치기 때문이다. 진화론적 관점으로 비유하자면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너무나 낮은 개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변화는 선생의 교체(지금까지의 관찰에 따르면 가장 큰 영향력이 있다), 학원 시스템의 변화, 시험 범위의 난이도 변화 등등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결국 단순한 눈 앞의 성적에 옭매여 있는 한 제대로 된 교육은 할 수가 없다. 결국 다음의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1. B그룹과 관련된 딜레마

학생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면서 평균 이상의 강의 능력을 가진 선생이 있다면, 성적을 올려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성적은 그 학생들의 실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하면 단기간의 성적에 급급한 학부모와 원장선생을 비롯한 학원 관리자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최악의 경우 잘린다)


앞서 언급을 하지 않았던 C그룹의 학생들의 경우는 답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학원비가 아깝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학원은 감옥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학부모들 중에서는 성적 향상은 기대하지 않고 다만 학원이라도 보내야 안심이 되고 적어도 학원에 있는 시간 중에는 탈선을 덜 하지 않을까하고 보내는 사람들도 실제로 제법 있다. 딜레마는 자신의 아이들의 현재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않고 욕심을 내는 경우에 발생한다

2. C그룹과 관련된 딜레마

가끔씩 동네에서 입김이 조금 쎈 몇몇 아주머니들의 자제들의 경우 따로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다(사실 이 부분이 학원을 다니면서 가장 맘에 안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p라는 학생은 특별히 신경 써서 성적을 올려라 그래야 그 부모가 다른 애들을 데리고 온다는 학원 경영상의 방침이다. 문제는 그런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귀를 닫아 놓은 상태인 것이다.

가끔씩 수업 중에 몇몇 학생들에게 나는 "좀비"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이원론을 절대 지지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들의 상황과 맥락에서는 그들은 육체과 정신이 분리된 상태이다. 분리된 정신이 있다면 그 정신은 아마도 어느 게임방이나 혹은 밖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있고 육체만 강의실에 있는 상황이다. 이런 학생들을 억지로 공부시키려고 하면 학생과 선생 둘 모두 힘들어진다. 결국 둘 다 불행해지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우리 학원의 학생들의 분포는 해가 갈수록 A는 적어지고(원래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는 전 학년 통틀어 2-3명 수준이 되었다) B그룹도 적어지고(재미가 점점 사라진다) C그룹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학원에 일하러 간다 = 아이들과 놀러 간다 라고 생각하고 강의를 하는 나에게 있어서 최근의 학원의 분위기는 점점 놀 아이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주고 있다.

작은 동네 보습 학원의 강사. 그것도 스스로 한직이라고 말하는 과학 과목의 강사(영/수 선생들은 보수가 쎈만큼 책임도 크다)인 나는 이렇게 내일도 주말 보강을 하러 학원으로 나선다.

결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 땅에 제대로 된 사교육이 자리 잡혀 나같은 날라리 꼴통 선생은 사라지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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